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과 그의 인생을 간략하게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49.1.12 교토 출생. 그 당시 흔치 않은 외아들로 태어났고 한다. 아버지는 사립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효고현의 슈쿠가와로 전학을 간다. 아버지는 주지스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오사카의 장사꾼집안 딸로 두 분 모두 간사이 토박이었다고 한다. 당연하게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지냈다고 하고 두 분 모두 국어교사라 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중일전쟁 당시 중국침략 일본군이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었고, 하루키가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중국군 포로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2차례 더 군에 소집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일본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서구 번역문학에 심취했고, 부모가 구독하던 세계문학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는 세계의 역사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신문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재수를 해서 1968년에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에 입학해 영화연극과에 진학했다. 본인 말로는 자신은 재수 생활 때에도 학원에도 등록하지 않고 하루 종일 라디오로 로큰롤만 들으며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와세다 대학은 지금처럼 들어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교 재학 중에는 연극 박물관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탐독하는가 하면 영화 각본가를 꿈꾸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레코드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부키초의 재즈 찻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에는 도쿄 스이도바시에 있던 재즈 찻집인 '스이도바시 윙'의 종업원이 됐다.
1971년(22세)에 학생 신분으로 결혼했고 침구가게를 운영하던 아내의 처가에 세들어 살았다.
대학교 졸업 전에 도쿄 코쿠분지시에서 '피터 캣'이라는 커피점(저녁에는 재즈바)를 개업해서 운영하였다.
애초에 결혼 후 새 집을 구할 때 카페도 같이 운영할 수 있는 형태의 가옥을 구했다. 글쓰다 망하면 카페를 해서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안전빵 부업을 뛰는 형태가 많았다. 참고로 위의 간판 삽화는 존 테니얼이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다.
가게 이름은 이전에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밤에는 재즈바가 되고, 주말이에는 라이브 공연을 실시했다. 개점 자금은 500만엔으로, 절반은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모은돈, 나머지 절반은 부모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가게는 아내와 함께 1974년(25세)부터 1981년(32세)까지 운영했다.
1975년(26세) 7년간 재학한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미국영화에서의 여행의 계보>로, 이 논문에서 아메리칸 뉴시네마와 '이지 라이더'에 대해 논했다. 1977년(28세) '피터 캣'을 센다가야로 옮긴다.
기사들을 찾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민 상담을 해준 내용들 일부였는데 전체 내용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50326/70352875/1
1978년(29세)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중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후로 재즈 찻집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매일밤 부엌 테이블에서 글을 계속 썼다.
1979(30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커트 보네거트,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문체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그려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 해 이 책이 제 8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81년(32세)에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재즈바 '피터 캣'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이듬 해에는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해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탔다.
1985년(36세)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해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따.
1986년(37세) 10월에 유럽으로 이주했다. 주된 체류지는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이었다.
1987년(38세) <노르웨이의 숲>이 상권, 하권을 통틀어 430만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국내외로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일어난다. 이 책은 100% 연애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소설이었다.
1989년(40세) 10월에는 하루키 소설 중 처음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영어 제목은 Wild Sheep Chase.
1991년(42세) 뉴저지주 프린스터 대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때를 전후로 걸프전이 발발했다. 그 다음 해에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객원 강사로 취임한다. 현대 일본문학 세미나에서 제 3의 신인에 대해 강의하면서 에토 준의 '성숙과 상실'을 서브 텍스트로 썼다.
1994년(45세) 4월에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 1부와 2부를 펴냈고, 이듬 해 6월 귀국했다. 8월에 제3부를 간행했다. 이듬 해 이책으로 제47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47세) 6월에 '무라카미 아사히도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1997년(48세) 3월에는 지하철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출판했는데, 그 떄까지는 오히려 내성적인 분위기로 사회에 무관심한 청년을 그려 왔던 하루키가 사회문제를 정면에서 다뤄 주위를 놀래켰다.
1999년(50세)에는 이 책의 속편으로 옴진리교 신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약속된 장소>를 발표해 제2회 구와바라 다케오 문예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게 된 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은 "커미트먼트"(commitment)라는 단어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무심함)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저에게는 제3스텝에 해당합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가 있고, 다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단계가 있는데, 마침내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거죠. 그 부분에서 commitment라는 것과 관련이 생겨났을 겁니다. 저 자신도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지만요.
- 동상(同上), 70쪽에서
2002년(53세) <해변의 카프카> 총 2권을 발표한다. 처음으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었다.
2004년(55세)에는 카메라아이와 같은 시점이 등장하는 실험적인 작품 <에프터 다크>를 발표했다.
2005년(56세) '해변의 카프카'의 영문 번역판인 Kafka on the Shore가 뉴욕 타임스의 "The Ten Best Books of 2005"에 선정돼 하루키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이 후 국제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에 대해서는 다음에 추가하려고 한다.
2009년(60세) <1Q84> 총 3권
또 재미있는 기사를 찾았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20458.html
2016년(67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낸다.
2017년(68세) <기사단장 죽이기> 총 2권을 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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