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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엄마의 행복한 아이교육

국영수보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

나는 아직 2돌짜리 첫째와 이제 갓 태어난 둘째가 있는 초보 엄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게 될 때의 걱정은 나에게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결혼을 생각할 때부터(임신도 안 한 상태에서) 보육 걱정을 했던 나 아니던가. 나는 이제 초등 교육, 아니 더 나아가서 아이들의 공교육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교육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사교육은 부모의 노후자금을 갉아먹는 것이고,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부모의 기대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결과를 낳는, 누구 하나 좋을 게 없는 것이라 믿고 있다. 사교육 시장에서 배를 불리는 기업이나 강사들을 보면 씁쓸해질 때가 많다. 그리고 학원을 보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고 친구를 만날 곳이 없어진 현실을 만들어 낸 모든 원인 요소들에 화가 난다.

아이들은 놀게 해야 된다. 말로는 쉽지만 우리 부모들은 불안하다. 아이 반 친구들은 다 학원 다니는데 우리 아이만 안 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한 부모님이 있다면 그분들은 정말 대단한 용기와 주위 눈을 신경 쓰지 않는 청개구리 배짱과 확고한 교육 철학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교육 시장이 '서서 영화보기'현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다. 앞사람이 영화관에서 서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뒷사람이 계속 앉아 있기란 쉽지 않으니까.

나는 어린 시절 7년간을 일본 도쿄에서 생활했었는데 북유럽의 숲유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린이집 근처에 숲 공원(?)이 있어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주위에 군데군데 달린 산딸기가 너무 맛있어서 발견하자마자 내가 초토화시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전까지 신나게 놀았었고 초등학교에 다니고 나서도 학원이란 걸 모르고 3학년까지 계속 신나게 놀았었다. 반에서 학원을 다니던 아이는 딱 2명밖에 없었는데 한 명은 주산학원, 한 명은 체조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부러웠던 적은 없고 그냥 아 쟤는 저런 거 배우는구나 싶었다.

내가 생활했던 도쿄 메구로구에서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닐 수 있는 지역 아동센터(일명 학동 클럽)가 있었다. 일본은 어머니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맞벌이 가정이 많았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여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1시쯤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동네 지역아동센터에 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인 5~6시까지 신나게 놀다가 집에 왔었다.

아동센터에서도 물론 보호자 역할을 하는 선생님이 계셨지만 아이들에게 프로그램을 짜주거나 시간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도서관처럼 책과 만화책이 있는 도서 공간(지금 생각해보면 만화책이 훨씬 많았고 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이 있고 방방 뛸 수 있는 트램펄린이 구석에 있고 술래잡기나 피구를 하며 뛰어놀 수 있는 체육관, 부엌도 있는 거실 같은 공간 등이 있었다. 선생님은 3~4명만 계셨고 아이들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같이 어울렸으며 인원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20~30명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곳에 그냥 보호자 역할로 있었고 우리들은 선생님께 그림 그려달라고 하거나 친구처럼 말을 걸거나 할 뿐 그분들이 놀이를 주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 가끔 한 달에 1~2번 구기대회나 간식 만들어 먹는 시간 같은 특별 이벤트일 때만 프로그램을 짜주는 정도였고 선생님은 그저 나이 많은 또 한 명의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시상','야마짱' 뭐 이런 식으로 불렀었다.

내가 일본에서의 방과 후 활동에 대한 얘기를 풀어낸 이유는 지금 우리들이 방과 후 교실에 기대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함이다. 왜 방과 후에는 꼭 무슨 영어반, 코딩반, 독서반, 요리반과 같이 프로그램으로 한정지어야 하는 걸까. 왜 그것들도 교과목화해서 아이들에게 뭔가를 배우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이들 스스로 놀면서 책도 읽을 수 있고 음악도 만들어볼 수 있고 요리도 해볼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만드는 건 왜 어렵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을 통제하기 힘들어서 그래 왔던 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일본에서 학교 끝나면 신나게 놀고 다시 학교 가는 것 또한 즐거운 그런 나날을 보냈었다. 근데 그게 깨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에 와서부터였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한국에 오자마자 수많은 숙제와 아침 0교시에 깍두기 노트에 가득 채워야지만 통과가 되는 한자 시간, 그리고 방과 후 피아노 학원 등에 치이며 그 전까지 놀면서 느꼈던 자유와 즐거움을 빼앗겼다. 그런 활동들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숙제에 대한 강박과 한자 쓰기로 인한 손가락 변형(그 당시 내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있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그 후로 20년이 넘었는데도 그 굳은살이 아직 남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피아노가 싫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적응을 정말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불합리함을 따지기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경쟁이 전부인 시험형 인간으로 길러졌다.

현재의 내가 나 자신에게 자랑스럽고 멋지다고 얘기해줄 수 있는 점들은 퇴사를 고민하면서부터 스멀스멀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되살아난 자존감들은 어린 시절 제약 없이 숲 공원에서, 아동센터에서 친구들과 목적 없이 그 어떤 제약 없이 놀던 때의 추억 덕분에 키워졌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내가 만약 그런 경험들과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헬조선이라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어하며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노는 시간도 딱 1시간, 2시간으로 정해놓고 논다면 진짜 노는 것 같을까? 우리 어른들한테도 주말에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은 3시간밖에 없다고 하면 우리는 반발할 것이다. 주말에 쉬는 것만 바라보며 평일에 뼈 빠지게 일했는데 아니 네가 뭔데 내 자유를 뺏냐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놀아도 놀아도 부족한 게 아이들인데 우리 부모들은 그렇게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믿고 놀게 놔두기에는 너무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감은 부모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이 상황의 불합리함을 느끼고 바꾸고자 한다면 불안이란 감정은 분노로, 그리고 변화를 위한 한걸음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을 실컷 놀게 하는 것이 방과 후 활동의 목적이라면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뭘까? 왜 우리는 아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검색창에 쓰면 정답이 나와있는 것들을 암기하는 공부를 아직까지 하고 있는 걸까? 숙제를 없애는 게 요즘 북유럽 국가의 학교들의 추세인데(아니 이미 없앤 지 오래일 수도 있다) 우리 부모들은 왜 아직도 '우리 아이가 숙제를 하고 놀아야 되는데 숙제를 안 하고 놀기만 하는데 어쩌죠?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먼저 숙제부터 끝내는 습관을 길러줄까요?'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

어른들도 숙제는 싫어하면서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을까? 숙제가 없는 학교, 강의식 암기 수업이 없어진 학교를 기대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일까? 정부에서 바꿔주길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 부모들이 할 일일까?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만약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면 무슨 과목을 재미나게 배울 수 있다면 좋을까라고.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쓰는 게 좋은지 : 돈을 금기시하고 돈을 밝히면 나쁜 거라고 쉬쉬하면서 어른들의 세계는 꽤 많이 돈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 또한 웃기지 않는가. 돈을 현명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우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울 필요가 있다.

- 성교육 : 집에서 알려주어야 할 것도 있지만 학교에서도 문제가 터지면 해결하기 급급한 게 아닌 건강한 성을 알려주고 아이들끼리 이야기할 수 있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노출되어 얼마나 잘못된 걸 쉽게 접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성교육을 2차 성징이 된 이후에나 알려주는 거라는 생각이 싹 달아날 텐데 말이다.

- 존중 :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언급하는 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가깝게는 아이들도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존중을 받지 못한 경험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런 걸 공론화하고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우리가 앞으로의 정치에 대해 국가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식사 :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프랑스에서는 아이들 점심 급식시간이 길고 여유로우며 전채, 메인, 치즈와 후식까지 나온다는 내용을 다루었었다. 이때 학교 측에서는 급식시간이 단순히 밥을 먹는다만이 아니라 식사 예절뿐만 아니라 건강한 먹거리를 함께 나누는 기쁨, 음식을 어떻게 즐기느냐 등 하나의 중요한 수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맛있고 건강한 급식에 대한 부러움 이상으로 그들의 생각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입에 쑤셔 넣기 바쁜 식사가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와 맛있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을 배운다는 것, 이게 학교가 공교육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진짜 건강에 대한 교육이 아닐까.




- 윤리 : 전기자동차 테슬라와 우주사업 스페이스 X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CEO 엘론 머스크가 자기 아이들을 포함해서 직원 아이들까지 7세~14세의 40명 정도의 아이들로 비밀 학교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학교에 대한 모든 것이 공개된 것은 아니라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는데 그중에 흥미로웠던 얘기는 윤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공장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공장에 취업해 있다. 그러나 이 공장으로 인해 호수는 오염되고 생명체들은 죽어간다. 공장 문을 닫는다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실업자가 된다. 반대로 공장을 계속 가동하면 호수는 파괴되고 생명체는 죽음에 이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와 같은 내용으로 토론을 한다는 것이다. 7~14세 아이들이 반구분 없이 함께 이러한 토론을 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는 나이가 서로 다른 아이들이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과보호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학 한 문제를 푸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어른인 지금에서야 아이를 키우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부모가 되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고 불안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니 아이가 수학을 남보다 못하는 것 같고 영어에 흥미가 없고 책 읽기 싫어한다고 걱정하는 마음을 살며시 내려두고, 우리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모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그 어떤 시간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